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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市民はいつも挑戦者を笑う "소시민은 도전하는 자를 비웃는다"의 진의

 

다이내믹한 투구폼에 낙차 큰 포크볼을 무기로 MLB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노모 히데오. 국내에도 박찬호의 라이벌로 널리 알려진 일본인 투수다. 한국에서는 노모에 대해 잘못 알려지거나 언론의 잘못된 프레임 때문에 비호감 선수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가장 흔한 사례는 한국 언론이 박찬호의 기회를 빼앗고 팀에서 괴롭히는 듯한 선수로 그리는 바람에 생긴 이미지가 있고, 다른 하나는 메이저리그에서 자리 잡은 이후 "소시민은 도전하는 자를 비웃는다"라는 자칫 거만해 보일 수 있는 인터뷰를 했다는 것도 공격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잘못되거나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이를 바로잡기 전에 먼저 노모 히데오의 야구 인생을 가볍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프로 데뷔부터 험난했던 야구 소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노모는 열성적인 야구팬인 부모님 밑에서 유소년기 대부분을 야구와 함께 시간을 보낸 야구 소년이었다. 특이하게 노모는 타격 대신 공을 던지는 피칭에 더 관심을 보였는데, 이 시기부터 조금씩 몸을 틀어 던지는 '토네이도 투구법'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야구를 워낙 좋아했기에 중학교 졸업 이후 야구 명문 고등학교인 '긴키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테스트 도중 "너 같은 수준의 선수는 널렸다"라는 혹평을 받으며 탈락한다. 결국 노모는 야구에선 무명에 가까웠던 세이조우 공업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노모의 세이조우 공고 입학이 꼭 나쁜 일은 아니었다. 비록 일본 고교 야구선수들의 꿈인 고시엔 대회는 단 한 번도 지역 예선을 통과하지 못해 경험하지 못했지만, 보수적이고 성과 지상주의에 가득 찬 야구 명문고와 달리 자유롭게 연습하고 개성을 인정해주는 세이조우 공고에서 '토네이도 투구폼'을 유지하며 완성도를 더욱 높여갈 수 있었다. 그 덕분에 2학년 시절엔 지역 예선에서 퍼펙트게임을 달성하며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포크볼을 익히기 전 노모는 사이드암 투수였다

 

하지만 명문고 야구 유망주들 사이에서 무명 고등학교 에이스가 높은 대접을 받긴 힘든 시절이었다. 노모는 긴텐츠 입단을 희망했지만, 긴테츠는 '투구폼을 고칠 생각이 있으면 받아줄께'라는 제안을 하는 바람에 무산된다. 당장 프로 입성을 원하는 선수였다면 구단의 제안을 받아들였겠지만,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장점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무기를 버리지 않았다. 결국 신일본제철에 입단한 노모는 사회인리그에서 다시 기회를 엿보게 된다. 

 

사실 노모는 신일본제철팀 입단도 "나에겐 행운이다"라며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투구폼을 손대지 않는다'라는 조건으로 입단한 노모는 이 곳에서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포크볼'을 습득한다. 팀 내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었던 나카가와가 무심히 알려준 포크볼 그립을 끈질기게 연마해 '토네이도 투구법'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낙차 크고 위력적인 포크볼을 장착하게 된 것. 이때부턴 그동안의 설움을 씻어내기라도 한 듯 탄탄대로를 걷기 시작한다. 

 

사회인리그에서 에이스 투수로 급성장한 노모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표로 선발됐고, 이 대회에서 야쿠르트의 전설이자 NPB 최고의 포수 중 한 명으로 뽑히는 후루타와 배터리를 이뤄 은메달을 수상한다. 시범종목이긴 했지만 준결승 선발로 나와 주최국인 한국을 상대로 1실점 호투를 펼치며 3-1 승리를 이끄는 등 프로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89년 노모가 드래프트를 신청하자 12개 구단 중 무려 8개 구단이 1차 지명으로 노모를 선택한다. 일본 프로야구는 특이하게도 1차 지명에선 각 팀들이 원하는 선수를 써낸 뒤 중복된 팀들이 제비뽑기로 성패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순위상 가장 늦게 제비를 뽑은 긴테츠가 노모의 지명권을 획득하며 고교 졸업 이후 외면했던 노모를 3년만에 다시 영입하게 된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신인! 하지만..

긴테츠 버팔로스는 노모가 꿈을 펼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당시 감독은 이치로를 배출한 오기 감독으로 선수들의 개성을 파악해 이를 장점으로 만들어주는 탁월한 능력을 갖춘 감독이었다. 팀 분위기도 자유스러운 편이라 노모의 '토네이도 투구폼'에 수정을 가하려는 꼰대가 없었다. 리그 개막부터 선발 로테이션을 꾀찬 노모는 4월 29일 오릭스와의 경기에서 17탈삼진 완투승으로 프로 데뷔 첫 승을 기록한다. 이후에도 강력한 직구와 포크볼 조합을 무기로 호투를 거듭하며 1990시즌 18승 8패, 평균자책 2.91, 235이닝동안 287탈삼진을 잡아내며 '최다승-최다 탈삼진-방어율 1위-승률 1위' 타이틀을 차지했고 해당 시즌 MVP와 신인왕, 사와무라상(MLB 사이영상격), 베스트9에 선정되는 최고의 영예를 누린다. 신인왕과 사와무라 상을 동시에 차지한 사례로 국한해도 곤도와 호리우치 단 2명뿐이고, 이 모든 상을 휩쓴 선수는 역사상 노모가 유일했다. 

 

이후 4년간 긴테츠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며 팀 우승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지만 당시 리그 최강팀은 세이부의 벽을 넘지 못하고 번번이 2-3위로 시즌을 마감한다. 팀 전력에 비해 긴텐츠가 선전한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1992시즌을 끝으로 오기 감독이 사임하고 스즈키 감독이 부임하면서 팀 분위기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다. 팀이 약속과 달리 노모의 투구폼에 간섭을 하기 시작했고 성적과 연봉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노모의 자존심을 건들기 시작한다. 이런 와중에 1993시즌 말엔 타구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에 실금이 가는 중상을 당하는데, 노모는 스즈키 감독 보란듯이 1주일 휴식 후 다시 마운드에 오르는 투혼을 발휘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몸을 혹사하는 투혼은 선수 생명을 갉아먹는 법. 게다가 4년 평균 234이닝을 던지며 직구-포크볼 위주의 단순한 구종과 탈삼진을 노리는 피칭 패턴 때문에 투구수도 많은 편이었터라 1995시즌 도중 어깨 통증 때문에 긴 재활의 시간을 갖게 된다. 

 

이미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한 팀&감독과 노모의 사이는 1995시즌을 극과 극으로 멀어지고 만다. 선발투수에게 구단 관계자가 본사 임원이 오고 있으니 구장에서 차를 빼 달라고 요청하는 사건과 4년 연속 최다승+최다 탈삼진이라는 NPB 유일무이한 기록을 달성한 시즌에 다년 계약을 요구하자 '1년 계약&동결'을 제시한 구단의 자세에 큰 실망을 느꼈다. 오히려 구단은 언론 플레이를 통해 "노모는 더 이상 팀의 간판이 아니다" "돈만 아는 선수"라 매도했다. 또한 팀을 위해 헌신하다 어깨 부상을 당한 선수에게 "이제 노모는 끝났다"라는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 스즈키 감독도 노모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이제 긴테츠는 노모가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모든 것을 건 MLB 진출 시도

1993년 미일 올스타전 멤버로 뽑힌 노모는 당시 미국 올스타로 방문한 로저 클레멘스에게 "미국으로 와라. 네 공이면 가능하다" 란 말을 듣고 MLB 진출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물론 미국인 특유의 립 서비스가 섞인 말이겠지만, 프로데뷔전부터 강한 도전정신으로 무장했던 노모를 MLB 진출로 이끈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1995년 야구 외적인 요소들로 더 이상 야구에 집중할 수 없게 된 노모는 이전부터 끈질기게 영입 제의를 주던 LA 다저스 입단을 선택한다. 

 

당시 리그 규정으로 FA 자격을 얻으려면 10시즌을 뛰어야 했지만, 노모는 MLB 진출을 위해 "은퇴"를 선언한다. 사실상 NPB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MLB 적응에 실패할 경우 그대로 야구 선수 생명이 끝나는, 인생을 건 도박이었다. 어깨 부상과 혹사 때문에 구위도 하락세였고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과 일본의 야구 수준 차이가 크다는 인식이 지배적으로 모두들 노모의 선택을 '미친 짓'이라 여겼다. 

 

미국에서도 이런 평가가 주류였다. 뉴욕 메츠와 애틀랜타가 노모를 테스트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지만 반응은 차가웠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하던 다저스도 노모에게 내건 조건은 입단 보너스 200만달러와 최저 연봉 10만9000달러였다. 10만9000달러를 당시 엔화로 환산하면 980만엔. 노모의 1994년 연봉(1억4000만엔)에 14/1에 불과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노모가 이때 "소시민은 도전하는 자를 비웃는다"라는 말을 남기지 않았다. 쫓기듯 미국으로 떠난 노모는 자신에게 적대적인 일본 언론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모두가 비관적으로 바라본 미국행이었지만, 결과는 모두가 알고 있듯이 대성공이었다. NPB 데뷔 첫 해 임팩트처럼 MLB 데뷔 시즌부터 '토네이도 투구폼'을 무기로 리그를 휩쓸었다. 

 

 

1995시즌은 파업 여파로 5월 3일이 돼서야 데뷔전을 가진 노모는 샌프란시스코를 상대로 5이닝 1피안타 무실점 피칭을 펼치며 준수한 데뷔전을 갖는다. 이후 6월 15일 피츠버그를 상대로 8이닝 16탈삼진 3실점을 기록하며 당시 다저스 신인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을 경신한다. 전반기를 6승 1패, 평균자책 1.99로 마감한 노모는 올스타 선발투수로 선정되며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다. 결국 1995시즌 13승 6패, 평균자책 2.54를 기록하며 치퍼 존스를 제치고 신인왕을 수상한다. 

 

 

언론이 만들어낸 박찬호와 라이벌 구도

노모는 96시즌 16승, 97시즌 14승을 거두며 다저스 선발 로테이션의 한축으로 자리 잡는다. 이때 한국인 첫 메이저리거인 박찬호도 서서히 MLB 무대에 얼굴을 보이기 시작한다. 1994년 한국인들이 큰 기대 속에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박찬호는 (지금 생각해보면 큰 의미 없는 사건이지만), 진출 첫 해 시즌 개막 로스터에 포함되며 당장이라도 MLB에서 큰 활약을 펼칠 듯 한 언론 보도들이 이어졌다. 

 

    투수들의 무덤 쿠어스필드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다

 

하지만 2 경기만에 한계를 드러내며 마이너리그로 내려갔고 1996년 중반까지 2년 반 동안 마이너리그를 벗어나지 못했다. 당시 노모는 최전성기를 보내며 승승장구하던 시절이라 마치 언론은 박찬호의 부진이 마치 노모의 영향이 있는 듯 보도했고, 악의적으로 국민 밉상을 만들기 위한 노골적인 기사도 서슴지 않았다. 노모가 어깨 부상 여파로 1998 시즌부터 부진이 시작되고 박찬호의 전성기가 시작되자 '극일에 성공한 영웅'으로 치켜세운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이미 NPB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27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진출한 노모는 한양 대학교 졸업 이후 20대 초반에 미국으로 건너간 사회 초년생 박찬호를 라이벌이라기보단 챙겨주고 싶은 동생처럼 대했고 박찬호 역시 노모를 팀 동료이자 선배로 존중했다. 1996시즌 박찬호가 라몬 마르티네스의 부상 때문에 급하게 중간계투로 올라가 4이닝 무실점으로 막고 생애 첫 승리가 확정된 순간, 아무도 박찬호의 첫승 공에 신경 쓰지 못하고 관중석으로 공이 던져지자, 노모가 관중석으로 올라가 공을 찾아왔다.  

 

또한 박찬호보다 많은 경험과 엄청난 주량으로 다저스 기존 선수들의 텃새를 무너트리고 동양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자리 잡는데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줬다. 이후에도 두 선수의 우정은 이어지는데, 박찬호가 124승을 거두며 동양인 최다승 기록을 경신하자 축하 인사를 건넸고, 박찬호가 은퇴 후 공주시에 기념관을 건립할 때도 찾아와 자리를 빛내주기도 했다. 

 

    2001년 AL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다

 

노모 히데오는 소시민을 비난하지 않았다

NPB시절부터 자신을 괴롭힌 어깨 부상으로 한동안 주춤했던 노모는 2001년 보스턴으로 이적한 이후 부활에 성공한다. 볼티모어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고, 2001시즌 220탈삼진을 기록하며 양대 리그(NL&AL)에서 탈삼진 1위-노히트노런을 기록한 투수로 기록된다. 2002년 다저스로 돌아와 2003년까지 32승을 추가한 노모는 2003년 어깨 수술 이후 급격한 노쇠화로 인해 메이저리그 마운드와 멀어진다. 

 

이미 망가진 몸 때문에 다이내믹했던 토네이도 투구폼도 사라지고 구위나 포크볼의 위력도 떨어졌지만,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다시 서겠다는 일념 하나로 마이너리그 계약과 독립리그를 전전하며 도전을 이어간다. 일본에서 다시 선수로 돌아오라는 제의도 있었지만, 돈과 편안한 길을 뿌리치고 도전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2005년 탬파베이와 계약이 종료된 이후 3년 넘게 도전만 계속하는 노모에 대한 관심은 차갑게 식었갔다. 

 

그러던 어느 날 노모를 인터뷰하러 찾아간 일본 언론은 "이제 일본에서 편하게 야구하는 게 어때?"라며 노모의 심기를 건드는 질문을 한다. 이때 노모가 "소시민(소인배)은 언제나 도전하는 사람을 비웃지"라며 자신의 신념을 이야기한다. 메이저리그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이후 도전하지 않는 소시민들을 깎아내리려 했던 발언이 아니라 끊임없이 도전하는 삶을 살았던 자신의 신념에 대한 표현인 셈이다. 

 

이런 신념이 하늘에 닿았는지 2008년 캔자스시티와 계약을 맺고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오른다. 결과는 3경기에서 4.1이닝 9실점을 내주며 부진한 기록만 남겼지만, 마지막 도전을 완수한 노모는 7월 18일 미련 없이 은퇴를 선언한다. "더 이상 팬들에게 보여드릴 퍼포먼스가 없다" 라며 노모 다운 마지막 인사를 남긴 체 말이다. 

 

현실과 타협했더라면 노모는 더 길고 평탄한 선수 생활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면 일본과 미국 야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야구 영웅은 사라졌을 것이고 어쩌면 동양 야구 선수들이 MLB에 진출하게 된 역사도 한참 뒤로 밀렸을지도 모른다. 

 

도전 정신과 투혼은 현대 프로 스포츠에서 '꼰대'나 하는 것이란 인식이 지배적인 시대가 다가왔다. 더 긴 선수생활을 위해 몸을 사리는 것이 당연하고, 실패 확률이 높은 곳에 도전하는 것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비난받는 경우도 많다. KT에서 활동하고 있는 황재균이 MLB에 진출했을 때나 박건우와 손아섭이 포스팅 신청을 했을 때 국내 팬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어쩌면 이성적이라 생각하고 가한 비난들이 어쩌면 노모가 일침을 가한 소시민들이 하는 편협한 생각은 아닐지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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