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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박사이자 인문학 관련해 여러 베스트셀러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를 통해 사피엔스와 다른 동물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피엔스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이를 많은 집단 구성원들이 믿고 따른다. 다른 동물들도 누군가를 속이고 천둥번개가 울릴 때 숨거나, 맹수가 나올 법한 수풀에 가까워지면 무서운 상상을 하지만 사피엔스들처럼 당장에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이나 체계적인 질서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우리는 승리의 여신 자손들이며 우리는 지지 않을 것'이라는 단순한 고대 신앙부터 '인권은 하늘에서 부여한 것이고 모든 이들은 평등하다'라는 현대 인권 의식도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가치들이다.

 

사회가 현대화될수록 더욱 세분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가치를 믿고 공유하게 만들었다. 민주주의, 주식회사, 인권, 신앙 등 전인류적인 심오한 가치들을 시작으로 영화, 드라마, 게임, 스포츠 같은 분야도 동일한 관심사를 갖고 있는 구성원들 사이에 특별한 존재를 추앙하는 '팬덤'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팬덤이 강력해지면 이른바 '신화'로 이어지는데, 스포츠도 이 영역에 다다른 선수들을 찾을 수 있다. 특히 농구는 '마이클 조던'을 '신'으로 추앙하며 절대 범접할 수 없는 '유일신'으로 여기는 신도들이 많다. 

 

무엇이 조던을 그토록 엄청난 존재로 만들었을까? 그리고 실제로 그런 상상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신화는 크게 네 가지 요소로 만들어진다

신화의 구성요소

신화는 넓은 의미에서 설화로 구분된다. 설화는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데, 1) 배경 2) 인물 3) 사건 4) 갈등 5) 화자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이클 조던의 선수이 신화가 되기까지 이 네 가지 요소들이 충실하게 갖춰져 있다. 

 

1) 배경 

1980년 NBA는 매직 존슨-래리 버드 라이벌 구도에 힘입어 전미적인 인기를 끌어모으는 계기를 만들었다. 두 선수의 라이벌 구도는 80년대 전체를 관통하며 NBA의 발전에 기여했지만 80년대가 지나면서 리그는 새로운 영웅을 만들어내야 했다. '닥터J' 줄리어스 어빙이 모지스 말론과 연합해 82-83시즌 한차례 우승을 만들어냈지만 1980년부터 88년까지 레이커스와 보스턴이 9시즌동안 8번의 우승을 양분했다. 

 

88-89시즌 디트로이트 피스톤스가 레이커스와 보스턴 왕조의 종말을 고하고 우승을 차지했지만, 이들은 너무 거칠고 매너가 없는 팀이었다. 영웅보다는 '악역'에 가까운 팀이었다.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소재로는 NBA의 성공스토리를 이끌기 역부족이었다. 토르를 대신해 로키가 아스가르드의 주인이 되어서야 영화는 흥행할 수 없다. 

 

'Bad Boys'란 절대악을 무너트릴 영웅이 필요한 강한 시대적 요구가 바탕이 되어 있었다. 

 

2) 인물 

마이클 조던은 새로운 시대의 영웅이 되기 위한 완벽한 주인공이었다. 

 

어린 시절 형과 함께 놀면서 농구를 시작했는데, 형을 이기기 위해 엄청난 시간을 농구 코트에서 보내 부모님의 걱정을 낳기도 했다. 이런 연습벌레 이미지는 대학시절에도 이어졌는데, 오죽하면 조던의 부모가 농구 선수가 되지 않았을 때 미래를 위해 다른 일도 해보라고 권할 정도였다.  

 

엄청난 노력에 겸비된 강력한 승부욕은 전 세계 프로스포츠를 뒤져봐도 두드러질 정도이며, 뛰어난 실력에 가미된 약간의 자만심과 제왕적 리더십은 중세시대 왕과 비교될 수 있을 수준이다. 최근 넷플리스에서 공개된 '더 라스트 댄스'에서 윌 퍼듀에 마이클 조던을 가리켜 '정말 못된 새끼'라 말할 정도일까? 물론 퍼듀도 인터뷰 막바지에 '하지만 팀 전체를 승리로 이끄는 리더'라며 조던을 추켜세웠다.

 

역사상 최고의 슈팅가드란 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농구는 빅맨들 위주의 다소 느리고 재미없는 트렌드의 농구가 우승을 위한 필승 공식이었다.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가 역사를 만들어냈지만 레이커스엔 카림 압둘자바 제임스 워디란 역대급 빅맨들이 있었고 보스턴 역시 로버트 패리쉬와 케빈 맥헤일이란 레전드급 빅맨이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마이클 조던은 강한 빅맨 없이도 스윙맨이 승리와 우승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증명했고 동시에 엄청난 체공 능력과 기술을 무기로 엄청난 하이라이트 필름을 만들어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었다. 호레이스 그랜트와 데니스 로드맨을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이전 우승팀들의 빅맨과 비교해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3) 사건(업적)

6번의 우승 타이틀과 5번의 MVP 타이틀, 10번의 득점왕과 14번의 올스타 경기 출전, 2개의 금메달과 1개의 NCAA 타이틀 등등 마이클 조던이 이룬 업적은 한 번에 설명하기 힘들 정도다. 더 궁금한 부분이 있다면 마이클 조던을 위키에서 검색해보자. 

 

 

4) 갈등 

마이클 조던이 가장 싫어하고 심하게 부딪쳤던 대상은 위에 언급했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리더 아이제아 토마스였다. 아이제아 토마스와 마이클 조던의 갈등은 알려진 것보다 더 심했다. 

 

1. 1985년 조던은 NBA 올스타에 생애 처음으로 뽑혔다. 라이징 스타로 각광받는 조던은 당시만 해도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겉멋 든 신인'이었다. 나이키와 대형 계약을 맺은 조던은 멋진 자동차와 값비싼 모피 코트, 보석으로 치장된 반지, 목걸이로 치장하고 다녔고 84-85 올스타전엔 선배들이 모두 팀 공식 의상을 입을 때 홀로 '나이키 점퍼'와 금 목걸이를 차고 나타났다. 

 

선배들은 조던을 교육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고 이 올스타전 내내 패스를 거의 주지 않았다. 조던은 22분 동안 9개의 슛을 던져 7득점-6리바운드에 그쳤는데 올스타 주전으로 뛴 선수들 중 가장 적은 슛을 던졌고 모지스 말론과 함께 가장 적은 득점이었다. 

 

모든 선배 선수들의 암묵적 동의가 있긴 했지만 주도한 것은 아이제아 토마스로 알려졌다. 토마스는 조던의 군기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한동안 조던이 인사를 하면 받아주지 않고 무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든 조던은 복수를 꿈꿨고 올스타전 이후 바로 이어진 디트로이트와의 경기에서 49득점을 폭발시키며 139-125로 승리했다. 

 

물론 조던도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깨닫고 쓸데없는 부를 과시하거나 선배들을 무시하는 듯 한 행동을 최대한 자제하기 시작했다. 

 

2. 한차례 복수에 성공했지만 디트로이트는 항상 왕좌에 오르려는 조던과 시카고 불스의 발목을 잡았다. 조던이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돌파한 87-88시즌 2라운드에서 1승 3패로 무너트렸고, 88-89시즌과 89-90시즌엔 지구 결승에서 시카고를 좌절시켰다. 디트로이트는 단단한 팀워크와 강력한 수비가 무기인 팀이었는데 말이 좋아 승부욕이 넘치는 팀이었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거칠고 매너 없는 팀이었다. 조던에겐 항상 토마스와 조 듀마스가 더블팀을 붙었고 골밑으로 돌파해오면 레임비어와 마혼이 펀치에 가까운 린치로 조던의 의지를 꺾으려 했다. 

 

하지만 디트로이트 선수들은 전성기가 지나고 하향세를 그리기 시작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고 90-91시즌 마침내 시카고 불스가 디트로이트를 격파한다. 시카고가 자신들의 숙적을 격파하는 순간이었지만 그 과정에서도 토마스와 마찰이 있었다. 0승 3패로 밀리던 디트로이트는 지구 결승 4차전에서도 큰 점수 차이로 뒤지며 사실상 경기를 포기했다.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됐지만 그동안 전성기를 이끌어준 선수들에게 디트로이트 홈 팬들도 박수를 치며 격려하는 분위기 속에 시리즈가 마무리 되는 듯했다. 

 

    7분 44초부터 해당 장면이 시작된다

 

경기 종료 7.9초전 아이제아 토마스가 벤치에서 쉬고 있던 디트로이트 선수들을 불러 모으더니 경기도 끝나지 않았는데 라커룸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그것도 조용히 나가는 것도 아니고 시카고 불스 선수들도 다 볼 수 있게 코트를 가로질러 나갔고 악수나 포옹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 '갱스터'같은 모습이었다. 

 

훗날 토마스는 인터뷰에서 "조던을 비롯한 시카고 선수들이 디펜딩 챔피언인 우리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에 대한 응답이었다. 우리 팀을 '없어져야 할 나쁜 팀' '리그를 위해 사라져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라고 밝혔지만, 조던은 이 행동을 마음 깊이 담아둔다. 

 

어쨌든 그 이후 한동안 디트로이트는 시카고를 넘어서지 못했고 1992년을 끝으로 배드 보이스는 해체된다. 그리고 전국에 방영된 이 사건으로 여론이 악화된 데다, 드림팀의 실질적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조던의 영향력에 의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드림팀1에도 선발되지 못하는 사필귀정의 길을 걷게 된다. 

 

조던의 갈등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던은 '패배주의'에 찌들었던 시카고 불스의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팀 동료들과도 치열한 갈등을 벌였다. 

 

3. 1984년 시카고에 드래프트 되어 팀에 합류한 조던은 경기 중반 점수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경기를 포기하고 잡담이나 하는 선배들의 모습이 못 마땅했다. 어렸을 때부터 패배를 용납할 수 없었던 조던은 이런 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스스로 팀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누구보다 코트에 먼저 나와 가장 늦게까지 연습에 매진했고 점수 차이가 아무리 벌어지는 경기도 몸을 사리지 않고 모든 것을 불태우는 모습을 보여줬다. "한 달 정도면 저러다 말겠지" 했던 선배들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고 조던 합류 이후 매년 플레이오프에 올라가는 팀으로 바뀌었다. 

 

플레이오프에 매년 오르는 강팀이 됐지만 조던은 우승이 절실했다. 혼자 우승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안 조던은 팀 동료들을 혹독하게 다그치며 자신이 원하는 수준으로 올라오길 바랬는데, 여기에 치인 동료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윌 퍼듀를 비롯해 호레이스 그랜트는 조던 앞에서 '고양이 앞에 생쥐'나 다름없었고 스티브 커나 B.J. 암스트롱도 연습 과정에서 조던과 트러블이 있었다.

 

나이키가 아니었다면 조던은 슈퍼스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5) 화자 

조던이 첫 번째 3연속 우승을 달성하고 리그 최고의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한 시점은 이제 막 TV와 여러 미디어를 통해 해외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던 때였다. NBA 중계권이 세계 곳곳으로 팔려나가며 전 세계에서 NBA를 보기 시작했다. 그 이전 세대 스타들도 나름 인기를 얻긴 했지만 자국(미국) 팬들의 비중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했던 반면 90년대 초반부터는 전 세계적으로 NBA 인기 저변이 넓어졌다. 그 증거로 90년대 초중반 조던과 경쟁했던 찰스 바클리와 하킴 올라주원, 레지 밀러, 샤킬 오닐과 엔퍼니 하더웨이 같은 선수들이 지금까지 30~50대 팬들에게 회자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나이키와의 만남도 운명적이었다. 세계 시장으로 판로를 넓히려 하던 나이키와 '라이징 스타' 조던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었던 운명의 상대였다. 조던을 앞세운 나이키의 강력한 마케팅은 경기 시간 이외에도 광고와 농구화, 젊은이들의 패션, 그들만의 유행을 통해 빠르게 퍼져나갔다. 

 

덕분에 조던의 신화는 다양한 화자(매체)를 통해 전 세계로 빠르게 전파됐다. NBA의 여러 무용담 중에 가장 먼저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신화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주인공이었다. 그 이전까지 이처럼 추앙받는 선수가 없었기에 "조던 같은 선수는 없었다"라는 명제가 사실처럼 느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신화였지만 마지막 신화는 아니다

6번의 우승과 2번의 컴백 이후 은퇴로 조던의 신화는 마무리됐다.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처음 마주한 조던의 신화가 절대적이며 다신 재현되지 않을 것이란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신화는 돌멩이나 바람, 농구공처럼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닌 만들어진 상상의 결과물이다. 이런 상상의 결과물에 대한 사람들의 동질감은 영원불멸하지 않다. 2000년대 이후 인터넷의 발달로 NBA 인기 저변은 더욱 넓어졌고 더 아크로바틱 하고 더 서커스 같은 슛을 넣으며, 더 빠른 템포의 경기에 적응된 선수들이 리그를 누비고 있다. 이 시대의 농구팬들도 새로운 신화와 영웅담을 만들어가며 자신들만의 신전을 만들고 있다. 

 

스테픈 커리나 르브론 제임스, 케빈 듀란트에 열광하는 이 시대 팬들에게 "마이클 조던이 최고였지" "조던이 아니면 의미 없는 루저들"이란 식의 평가를 한다면 마치 2020년에 와서 조용필이나 서태지가 최고였다고 이야기하는 옛 세대의 꼬장꼬장한 잔소리밖에 되지 않는다. 

 

당신의 신화가 그 시대 사람들이 공유한 소중한 자산인 만큼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가는 서사도 존중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농구뿐 아니라 세계 역사를 살펴봐도 전 시대와 세대, 인류를 관통하며 모두를 감동시키는 신화란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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