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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볼코베츠는 지난 1월 뉴욕 양키스 싱글A팀 감독에 오르며 미국 프로야구 최초의 여성 감독이 됐다. 그리고 지난 9일 미국 플로리다주 레이크랜드에서 열린 레이크랜드 플라잉 타이거스와의 시즌 개막전에서 9-6으로 승리를 이끌었다. 여자 감독이 거둔 역사적인 첫 승리였다.

하지만 볼코베츠가 승리의 영광을 얻기까지 정말 힘겨운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지난 3월엔 팀 훈련 도중 얼굴에 타구를 맞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볼코베츠는 11일만에 현장으로 복귀하는 투혼을 보여줬다.

21세기 스타르탄 볼코베츠
34살의 볼코베츠는 지금까지 자신의 소유인 가구가 없다. 거주를 위한 집도 없었는데 최근에 볼코베츠가 집을 샀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그녀의 측근들은 뉴욕 양키스가 그녀와 접촉했다는 뉴스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최근 3월 사고를 당하자 볼코베츠의 아버지가 그녀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의자를 산 것이 유일한 가구였다. 이전까지 볼코베츠는 자신의 차 뒷트렁크에 모든 짐을 넣어놓고 다녔고 모든 세간살이가 뒷트렁크에 맞게 세팅되어 있었다.
고대시대 스파르타인처럼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기도 하지만, 극도의 비세속적인 삶을 사는 볼코베츠는 이 시대 진정한 스파르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양키스 싱글A팀과 계약한 이후 그녀의 삶도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9일 볼코베츠는 Tampa Tarpons와 Lakeland Flying Tigers의 역사적인 경기의 감독으로 나섰다. 경기가 시작되자 관중들은 선수 이름을 대신해 'Go 볼코베츠'를 외칠 정도로 열성적인 응원을 보내줬다. 승리 후 인터뷰에서 "내 이름이 그렇게 많이 불린 것은 처음이었다. 15-20년전 관중석에 앉아있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정말 멋있었고 재밌었다"라며 소회를 남기기도 했지만 최근까지 경기장에 나올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감독 데뷔 직전 찾아온 불운
3월 22일 볼코베츠는 팀 훈련 도중 타구에 얼굴을 맞았다. 사고 직후 그녀는 인스타그램에 "모델의 꿈이 사라졌다"라며 농담을 남겼지만 부상 정도는 매우 심각했다. 의사는 그녀에게 5~7일은 무조건 휴식을 취하라고 강권했을 정도였다. 볼코베츠의 누나인 스테파니는 일시적으로 볼코베츠의 왼쪽 눈 시력이 사라질 정도로 심각했다고 부상 정도를 알리기도 했다. 스테파니는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탬파베이로 날아가 그녀의 동생을 돌보는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레이첼 볼코베츠는 빠르게 회복했고 시력도 돌아왔다.

"모든 면에서 레이첼은 운이 좋았어요"

레이첼이 새로 산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스테파니는 그녀를 위해 TV와 조명 기구를 구입했다. 누나의 도움 덕분에 볼코베츠는 침대에서도 외눈으로 팀의 경기를 체크할 수 있었다. 물론 경기내내 전화를 통해 팀 상황을 전달받는 열성도 함께 보여줬다. 볼코베츠는 지난 12년간 3개 국가와 15개의 도시를 떠돌아 다니며 원했던 이 순간(감독 데뷔)을 맞이하는데 조금 더 인내의 시간이 필요해졌지만 그녀의 강인한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NFL키커를 꿈꾸던 13살 소녀
97년 혹은 98년, 볼코베츠가 4학년인 시절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나중에 커서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 반의 모든 여자학생들이 격자무늬 치마와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던 시절이었지만 볼코베츠는 NFL 최초의 여성 키커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옆자리에 있던 남학생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웃었다.
하지만 20년 후 그 남자아이는 볼코베츠에게 오마하의 스쿠트 카톨릭 고등학교 동문 공로상을 전달하는 수여자로 나섰다.

어릴 적부터 볼코베츠가 당시 여자아이들과 다른 의식을 갖게 된 것은 그녀의 아버지 영향이 컸다.

그녀의 아버지, 짐 볼코베츠는 둘째 아이였던 레이첼 볼코베츠에게 항상 "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가르쳤다. 물론 그 시대 모든 부모들이 딸들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짐은 그 정도가 달랐다. 매일 새벽 3시 기상해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고객 서비스 업무를 위해 새벽 5시까지 공항에 출근한 짐은 회사에서 공로상까지 받았다. 그는 딸들에게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얻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녀의 어머니, 보니 볼코베츠도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직계 가족 중 유일하게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자식이 있는 상황에서도 남편인 짐이 퇴근한 이후 야간 대학을 다니며 학위를 이수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레이첼 볼코베츠의 부모는 자식들을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지만 자식들에게 마냥 베푸는 성격이 아니었다. 볼코베츠의 친구들이 고가의 옷을 사입는 동안 그녀는 재고 세일 상품과 오프 브랜드 신발을 신고 다녀야했다.

"부모님은 의도적으로 저희들에게 힘든 생활을 하게 의도하셨죠. 저희들에게 금전적으로 거의 지원하지 않으셨어요"

성장한 볼코베츠는 축구를 하기 시작했고 드레스를 입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그 시절 한창 유명했던 닌자 거북이의 미켈란젤로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했다. 또한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토요일마다 축구 경기를 함께 시청하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볼코베츠는 더이상 NFL 진출의 꿈을 꾸진 않았지만 또다른 도전을 통해 장벽을 부수고자 했다.

소프트볼 승부욕의 화신
고등학교에 진학한 볼코베츠는 소프트볼을 시작했다. 당시 코치는 볼코베츠가 포수 포지션에 완벽한 선수라 생각했다.
한창 포수로 뛰던 볼코베츠는 어느날 팀 연습에서 2루로 공을 뿌리는 연습을 하다 같은 팀 투수의 뒷통수에 공을 던졌다. 원래라면 투수가 송구궤도에서 빠져나가야 하지만 잊어버린 것이다. 송구에 머리를 맞은 같은 팀 선수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볼코베츠는 코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코치님. 얘가 그 자리에 없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다행히 투수는 큰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또다른 시합에선 스카우트를 위해 많은 대학 코치들이 지켜보는 경기에서 삼진을 당한 볼코베츠는 방망이로 헬멧을 쓴 자리의 머리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만약 그녀의 팀 코치가 그만두지 않으면 팀에서 내보내겠다는 불호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분을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그 이후로 볼코베츠는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 물론 승부욕만 넘치는 것이 아니었다. 발코베츠는 팀에서 신입 선수들의 장단점을 파악해 그들을 이끄는 역할을 수행했다.

볼코베츠는 Creighton 대학에 진학해 소프트볼 경력을 이어갔고 후에 뉴멕시코 대학으로 편입했다. 그곳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지만 고등학교 말엽부터 생긴 입스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결국 입스 때문에 팀에 도움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한 볼코베츠는 경기장이 아닌 웨이트룸에서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로 결정한다.

새로운 길을 찾다
운동역학과 컨디셔닝에 대한 지식을 쌓은 볼코베츠는 운동관련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하며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이후 LSU에서 대학원 조교 생활을 하고 소프트볼 관련 코치나 훈련을 담당하는 역할로 커리어를 쌓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볼코베츠는 새로운 스포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무렵 뉴멕시코에서 알게된, 이제 막 드래프트 된 야구선수와 만남을 가지며 마이너리그 야구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프트볼 경력을 갖고 있는 여성으로 야구계에 발을 내딛는 것은 한계가 분명해보였다.

"제가 처음 야구관련 일을 시작한 10년 전만해도 여자를 위한 고위 코치직에 대한 장벽은 존재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던(급여도 한 방법) 최고 수준으로 올라가고 싶어하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뒤쳐져있죠. 예전엔 여성 스포츠의 체계를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려 했다면 이젠 여성의 전반적인 활동에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볼코베츠는 2012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말단 계열사인 존슨 시티의 컨디셔닝 코치로 임시계약을 맺었다. 여기에서 두각을 나타낸 볼코베츠는 2012년 아펠레치아 리그 올해의 체력 코치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3년에 그녀는 피닉스로 이사하여 두 번의 인턴십을 했다. 하나는 무급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하루에 30달러인 인턴십이었다.

볼코베츠에겐 이 시기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 무려 8곳의 인턴십을 신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한 곳은 성공적으로 인터뷰를 마치고 합격이 기정사실처럼 여겨졌지만 최고위 수뇌부가 여성과 일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는 바람에 불합격 통보를 내리기까지 했다. 결국 볼코베츠는 웨이트리스 아르바이트를 해야했다. 아르바이트 도중 야구 경기가 열리는 TV방송을 보고 화장실로 가 울기도 했다.

"마치 다른 행성에 있는 느낌이었다"

힘든 시기가 지나고 2014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그녀를 마이너리그 체력 및 컨디셔닝 코디네이터로 고용했다. 그리고 2년 후 휴스턴이 라틴 아메리카 선수들 전용 체력 및 컨디셔닝 코디네이터로 고용해 도미니카 공화국에 있는 아카데미에서 일하기도 했다. 여기서 볼코베츠는 선수들에게 스페인어를 배우며 독학하는 열정을 보여줬다. 휴스턴의 GM인 피트 푸틸라는 팀 빌딩을 하는 과정에서 경쟁과 학습에 열정을 갖고 있는 볼코베츠에게 큰 인상을 받았기도 했다. 10년간 컨디셔닝 코치로 경력을 쌓은 볼코베츠는 여기서 만족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한번 더 자신을 시험하기로 결심한다.

타격코치가 되길 원하다
볼코베츠는 완전히 새로운 경력을 쌓길 원했다. 그녀는 신용카드로 대출을 끌어모으고 얼마안되는 자산을 팔아 암스테르담에서 2급 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그녀는 타격코치가 되는 것을 새 목표로 삼았다.

생체역학에 포커스를 두고 공부를 시작한 볼코베츠는 드라이브라인 베이스볼 스포츠 단지에서 연구 개발 팔로우십을 이어갔다. 시애틀의 트레이닝 센터인 드라이브라인 베이스볼은 마치 야구선수들의 정비소 같은 곳이다. 볼코베츠는 이 곳에서 타자들의 시선추적을 연구했지만 가장 큰 공헌은 모션 캡쳐 연구실에서 이루어졌다.

모션 캡쳐 연구실은 선수들의 동작 데이터를 얻기 위해 전신에 마커가 있는 반바지나 속옷 차림으로 낯선 사람들 앞에서 공을 던지거나 방망이를 휘두르는 어색한 풍경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볼코베츠가 합류하자 그녀는 선수들에게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묻기 시작했고 가벼운 격려와 잡담을 나누며 분위기를 풀어주는 모습을 보여줬다.
레이첼은 이 곳의 문화와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선수들이 성과를 얻어가는데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며 연구소 관련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남겼다. 특히 다치기는 것이 두려워 상체 웨이트를 두려워하는 투수들에게 웨이트룸에 들어가 한번이라도 더 팔 운동을 하라는 그녀의 철학은 선수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꿈을 이루다.
마침내 2019년 휴스턴의 마이너리그팀 타격코치로 고용된다. 그동안 있었던 이력서상 차별과 실망을 극복하는 순간이었다.
휴스턴은 볼코베츠를 고용하는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매우 높게 평가하는데 놀랐다.

양키스의 타격코치인 딜론 로슨은 그녀를 "선수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선수들이 자기 자신을 더 믿게 만든다. 그녀의 능력은 전염성이 있다"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그동안 그녀가 쉬지않고 열성적으로 달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불가능한 일에 목 메지 말고 적당히 하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아마도 볼코베츠는 그런 사람들에게 "어쩌라고"라는 말을 남겼을지도 모르겠다.

볼코베츠는 지금까지 겪었던 경험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고등학교 시절 많은 남자들이 저한테 너 참 귀엽다, 너 참 열심히 하네 라는 말을 했어요. 하지만 현실 사회에 들어와 경쟁을 하고 그들을 뛰어넘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하자 확 달라지더군요. 오히려 "네가 여자라서 이렇게 오버하는거야?" 라고 하는데.. 뭐라고 (ㅅㅂ) 그냥 내가 열심히 하고 싶어서 한거야"

그렇다고 볼코베츠가 워커홀릭이거나 여자의 삶을 포기했다고 지래짐작하지 않길 바란다. 볼코베츠의 인스타그램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화장과 춤 추는 것을 좋아하고 수영복을 입고 셀카를 올리는 것을 즐기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시즌이 끝나며 휴가를 떠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선택한다.

더 큰 꿈을 그리다
마이너리그 감독 데뷔와 승리를 경험한 볼코베츠는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그녀는 언젠가 야구팀 단장이 되길 원한다. 물론 이것도 최종 꿈이 아닐 수 있다.

물론 현재는 감독이란 직책에 충실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개막을 앞두고 어떤 변수에 놓인 상황에 맞이하더라도 대응하기 위해 야구 룰 북을 탐독하고 있다. "긴장된다. 내가 실수한다면 사람들이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릴 것이다 "임포스터 신드롬에 시달리나?" 그럼 나는 "매일 존나 시달린다"라고 답할 것이다. 왜냐고? 정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다. 볼코베츠는 평생 긴장과 경쟁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어왔다. 오히려 긴장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안주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그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자신이 '파우더 퍼프 페미스트'로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비록 8살 소녀에게 볼코베츠는 영감을 주는 모델이 아닐수 있다. 하지만 이제 사회에 발을 내딛은 20살 여성들에게 그녀는 롤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최근 여러 매체에 올라왔던 볼코베츠의 기사들을 최근 시점으로 믹스한 글입니다.
미국 특유의 사소한 서사문구들은 모두 뺐고 의역도 넘쳐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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