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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라이벌은 누구인가요? 

이 물음은 누군가는 "나의 가장 큰 라이벌은 나 자신이다"라며 손이 오그라드는 답변을 하겠지만, 그 정도 수준에 오르기 전까지 라이벌은 자신이 성장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동기부여이면서 시샘의 대상이 될 것이다. 

 

특히 10-20대 젊은 시절 라이벌이라 하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극복의 대상'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30대가 넘어가면서부터는 라이벌은 '내가 성장하는 걸 지켜본, 일생을 함께한 동반자' 같은 성격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삶에 있어 라이벌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복합적인 단어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번에 소개하는 두 사람이야 말로 이런 '라이벌'의 의미에 가장 부합하는 상징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어둡고 마이너 했던 1970년대 NBA

 

현시대의 NBA는 다양한 스타플레이어와 다양한 플레이 스타일을 가진 팀들로 구성된 최고의 스포츠 리그로 평가받는다. 하프라인부터 3점 슛을 넣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태연한 스테픈 커리부터 상대 수비 발목을 꺾어버릴 듯한 드리블을 갖춘 카이리 어빙, 여전히 위력적인 피지컬과 운동능력으로 덩크를 내려찍는 르브론 제임스 등 화려한 쇼맨쉽과 기량을 갖춘 선수들이 TV와 핸드폰, 모바일 기기 앞으로 팬들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NBA가 만들어진 이후 1970년대까지 농구는 그야말로 '그들만의 리그'였다. 

 

실력이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닌 매스컴의 관심이나 팬들의 관심이 제한적인 스포츠였다는 뜻이다.

(좌) 빌 러셀과 (우) 윌트 체임버린은 TV 시대를 비껴간 스타플레이어다.

빌 러셀과 윌트 체임버린 등 흑인 선수들이 주도하는 리그 트렌드에 백인들은 반감을 갖고 있었고, 농구의 역동성을 담아내기엔 당시 중계 기술이나 TV 보급률은 지금과 비교해 확연히 떨어졌다. 지금이야 모바일 디바이스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하이라이트 필름을 감상할 수 있지만, 당시엔 띄엄띄엄하는 TV 중계나 뉴스가 아니면 영상을 볼 수 볼 수 없었다. 그나마 신문 지면도 한정적인 공간에 흑백으로 전달될 뿐이었다. 선수 의식도 뒤떨어져 경기 승패보단 약물과 사건사고 소식이 더 많이 알려지기 일수였다. 

 

사회적인 요소도 악영향을 미쳤는데, 70년대부터 불어온 '인종차별 철폐'의 바람과 외국인 노동자들의 유입으로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역효과로 백인들의 보이지 않는 반감은 커지기 시작했다.  특히 흑인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던 NBA는 백인들에게 '흑인들만의 리그'란 낙인이 찍혔다.

 

윌트 체임버린이 100 득점을 올리든, 빌 러셀의 보스턴 셀틱스가 11번의 우승을 차지하든, 엘진 베일러가 지독한 2인자 불운에 시달리든 미국 이외의 나라에선 큰 관심도 없었고 미국 내에서도 이슈로 떠오르지 않았다. NFL-MLB에도 인기 순위에서도 밀리는 것은 물론이고 NCAA에게도 점유율이 밀릴 정도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러셀과 체임버린이 은퇴한 이후 NBA는 중계권 계약에서 찬밥 신세였고 관중 점유율도 하락세에 접어들었다.

 

미국 내에서도 별 볼일 없던 NBA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1979년 NCAA에 최고의 라이벌 매치가 성사되면서부터다. 

 

역사적인 라이벌리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 'Story'

매직과 버드의 첫 맞대결은 NCAA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어빈 '매직' 존슨은 1959년 디트로이트의 한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존슨의 아버지는 7명의 자녀를 부양하기 위해 디트로이트 외곽에 있는 GM 공장의 야간 조립 업무를 맡았고, 이마저도 부족해 쓰레기 운반업도 함께 병행했다. 미국 내에서 중산층이라 하기엔 약간 부족한 환경이었지만 존슨은 등교하기 전 오전 6시부터 항상 농구 코트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린 시절부터 농구와 가까이 지낸 존슨은 고등학교 시절 한 경기에 36 득점-18 리바운드-16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이를 기사화한 신문이 'Magic'이란 별명을 처음 지어줬다. 그 이후 어빈 존슨은 매직 존슨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래리 버드는 1956년 인디애나 주의 한적한 시골인 프랜치 릭이란 곳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웨이트리스로 일을 했지만 한국전 참전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직업이 없었던 적이 더 많았다. 이런 가정환경 탓인지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버드가 13살이 됐을 때 인생의 변화가 찾아온다. 인디애나 주에 있는 이모집을 방문한 버드는 근처에 있는 농구장에서 동네 아이들과 농구 시합을 펼쳤는데 타고난 실력이 있었던 덕인지 경기를 그야말로 휘어잡았다. 아이들은 버드의 등을 때리며 "굉장하다"며 칭찬을 연발했고 버드는 이 기억이 평생 농구를 사랑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버드의 대학시절도 굴곡진 시기였다. 버드는 장학금을 받고 인디애나 대학 농구부에 스카우트됐지만 시골에서 인생 대부분을 보낸 '프렌치 리크에서 온 촌놈'(The Hick from French Lick 실제 버드의 별명이었다)은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팀 선배들도 '촌놈' 버드를 놀리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힘든 시간을 보내던 버드는 인디애나 대학을 24일 만에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으로 내려가 공원 페인트칠, 쓰레기 수거, 잔디 관리 등의 허드렛일을 하다 빌 호지스 감독의 부름을 받고 인디애나 주립대학에 입학한다. 

 

버드가 워낙 힘든 대학시절을 보내서 비교가 되질 않지만, 존슨도 학창 시절이 평탄하진 않았다. 흑인들이 주로 다녔던 고등학교에 입하고 싶었지만, 가정사정상 백인들이 많은 고등학교에 입학해야 했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인종차별은 당연했고 농구부 활동서도 존슨에게 패스가 한 번도 오지 않는 황당한 경험을 겪어야 했다. 다행히 확고한 철학이 있었던 코치의 개입과 존슨의 압도적인 실력 앞에 이런 차별은 무의미했다. 

 

고등학교부터 전국 우승을 경험한 존슨은 고향 근처에 있는 미시간 주립대에 입학했다. 미시간 주립대는 농구 명문팀과는 거리가 있었다. 버드가 속한 인디애나 주립대학도 전체적으로 하위권 대학으로 평가받았다. 

 

전통의 강호는 아니었지만, 두 선수가 합류한 이후 성적은 급 반등했다. 미시간 주립대는 존슨 입학 전 해 10승 17패를 기록했는데, 존슨 2학년이 된 시즌 25승 5패를 기록하며 NCAA 결승에 올랐다. 인디애나 주립대는 버드 합류 전 12승 14패에 그쳤던 팀이 1979년엔 디비전에서 27전 전승을 기록했다. 

 

힘든 역경을 딛고 일어난 흑인과 백인의 농구 스타가 1979년 NCAA 결승에 맞붙었다. 두 선수의 스토리는 전미 농구팬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매료시키기 충분했다. 

 

1979.3.26 NCAA Final MSU vs ISU

두 팀의 맞대결은 미디어에서 엄청난 폭발력을 나타냈다. 신문과 잡지는 이미 결승전 며칠 전부터 버드와 존슨이 얼굴로 도배됐고, 결승전 당일 TV 시청률은 38%로 4천만 명 이상이 이 경기를 시청했다. NCAA와 NBA를 통틀어 이 시청률은 최고 시청률 기록으로 깨지지 않고 있다. 

 

미시간 주지사는 결승전 일정과 해외 정치인 미팅 일정과 겹치자 결승전 후반전을 보기 위해 일정을 서둘러 마치고 집무실로 돌아왔다는 믿거나 말거나 식의 여담이 있을 정도였다. 

결승전 직전 언론 인터뷰에서 함께 사진을 찍은 버드와 존슨

 

이 경기는 미디에서 띄워준 만큼 충분히 명승부였다.  승부는 버드 '원맨팀'이었던 인디애나 주립대학을 미시간 주립대가 철저하게 버드를 압박하는 전술로 밀어붙여 75-64 승리를 따냈다. 버드는 시즌 첫 패배를 가장 중요한 경기에서 당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팀 패배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존슨은 자신이 왜 '매직' 존슨이라 불리는지 증명하려는 듯 다재다능함을 뽐냈다.

 

미시간 주립대학의 승리로 끝났지만, 누가 승리했는지는 NBA 역사를 돌이 켜봤을 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농구를 마약과 약물로 쩌든 리그라 폄하하지 않았고, 미디어 지면과 방송 헤드라인으로 소비되는 것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NCAA 결승전은 끝났지만 이제 존슨과 버드가 어느 팀으로 드래프트 될지 초유의 관심을 받게 됐다. 

 

버드는 이미 1978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6순위로 보스턴에 지명된 상태였다. 2학년을 마치고 NBA 드래프트에 나설지 확신이 없어 고민할 때 보스턴이 미리 버드를 '찜'한 것이다. 집안 형편 때문에 당장 수입이 필요한 버드는 NBA 진출이 절실했다. 하지만 어중간한 순위로 지명되면 계약금-연봉에 큰 손해를 볼 수 있어 망설이던 상황이었다. 보스턴은 당장 1년을 쓰지 못하는 선수를 6순위로 지명하고 바로 5년짜리 대형 계약을 제안해 버드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이 선택은 빌 러셀 시대 이후 리빌딩이 시급했던 보스턴에게 '신의 한 수'가 됐다. 

 

존슨은 1979년 NBA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로 LA 레이커스로 지명된다. 레이커스는 윌트 체임버린과 제리 웨스트가 이끌던 1970년 전성기가 끝나고 리빌딩에 돌입한 상태. 유타 출신 사업가 제리 버스가 팀을 인수한 이후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밀워키의 강력한 센터 카림 압둘자바를 영입했고, 압둘자바를 뒷받침할 가드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1978-79 시즌 47승 35패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등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시즌 도중 개일 굿리치를 뉴올리언스로 보내며 얻은 1라운드 드래프트 권리가 1979년 1라운드 1픽 행운으로 돌아왔다. 

 

드래프트가 확정된 이후 단장과 함께 자신을 찍는 매직 존슨

NBA 흥행을 이끈 'Rivarly' - 시대가 라이벌을 만들다

두 선수의 NBA 합류는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NBA 황금기'를 이끌었다. 

 

NCAA의 역사를 쓴 선수인 만큼 NBA에서도 데뷔 시즌부터 임팩트 있는 활약을 펼쳤다. 이후 80년대는 레이커스와 보스턴의 라이벌 대결 역사로 대표할 수 있다. 이 라이벌리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팬들의 충성도나 미디어의 관심도도 높아졌다. 다만 이런 현상은 단순히 두 선수의 출중한 실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981년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의 4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레이건은 '레이건 노믹스'로 불리는 자유주의 정책 신봉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인종 화합을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쓴 사회 화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경제적-정치적으로 백인들과 동등한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행정과 사법분야에서 진보적인 결정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그동안 불평등에 시달린 흑인들을 위해 '적극적 우대조치'(Affirmative Action)로 불리는 정책을 통해 적극적인 복지정책을 실행했는데, 이는 경제적으로 낙후된 상황에 놓인 백인들에게 '반감'을 사기 충분했다. 가진 것이라곤 자신이 '백인'이라는 자존심밖에 없었던 이들은 사회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좌절에 사로잡혀 더욱 인종차별적인 공격성을 드러내곤 했다. 

 

특히 보스턴은 '백인 우월주의'가 만연한 도시였다. 

지금은 보스턴 종합 대학을 중심으로 한 젊은 사람들의 유입이 늘어나고 첨단 과학 산업이 유치되며 인종차별이 약해졌지만, 당시 보스턴은 백인 노동자 그룹이 구성원의 대부분이었다. 보스턴 셀틱스도 이런 성향이 그대로 녹아들어 흑인 선수들 비중이 점점 늘던 NBA 리그 트렌드와 달리 케빈 맥헤일과 대니 에인지 등 백인 선수들을 주축 스타로 내세웠다. 

 

물론 흑인 선수가 아예 없진 않았다. 1950년 첫 흑인 선수로 척 쿠퍼를 드래프트 했고 데니스 존슨, 세드릭 맥스웰, 빌 러셀 등을 영입했지만, 다른 팀들과 비교해 흑인의 비율이 낮았다. 이런 보스턴에 가난한 가정 형편과 금발, 파란 눈을 가진 '촌놈' 버드는 백인 팬들의 감정이입이 쉬운 스타였다. 

 

1980년 리그 우승 후 단체 사진.. 흑인 선수는 단 3명에 불과했다. 

반면 레이커스는 보스턴과 정반대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팀이었다. 

LA라는 도시 자체가 많은 인종들이 유입되며 인종 차별이 가장 먼저 무너진 동네였고, 경직되고 정체된 동부와 달리 자유롭고 개방된 문화 속에 노출된 사람들이 많았다. 레이커스도 제임스 워디와 카림 압둘자바, 마이클 쿠퍼 같은 흑인 스타들을 대거 보유하고 있어 '흑인'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현란한 드리블과 패스를 펼치는 존슨의 플레이 스타일은 레이커스뿐 아니라 LA 팬들의 취향에 100% 부합했다. '쇼타임'이라 불리는 존슨의 레이커스는 보스턴과 함께 '흑과 백' 맞대결 구도를 구축하며 80년대 NBA를 양분했다. 

 

1980년 시즌 신인왕은 래리 버드가 평균 21.3 득점-10.4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가져가자 존슨은 데뷔 시즌 팀 우승을 견인하며 존재감을 어필한다. 버드도 1983~86년 MVP 3연패를 비롯해 데뷔 후 두 번째 시즌인 1981년 팀 우승을 선물한다. 그리고 1984년 모든 NBA 팬들이 바랬던 꿈의 대결이 성사된다. 

 

레이커스가 2번, 보스턴이 1번의 우승을 달성하는 동안 LA 레이커스와 보스턴 셀틱스의 파이널 맞대결은 단 1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1984년 두 팀의 맞대결이 성사된 것이다. 

 

래리 버드의 오랜 기다림 '복수에 성공하다' 

래리 버드는 1984 시즌 평균 24.4 득점, 10.1 리바운드, 6.6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생애 첫 MVP에 선정됐다. 보스턴도 승승장구하며 62승 20패로 리그 전체 승률 1위를 기록했고 플레이오프에서도 워싱턴과 뉴욕 닉스, 밀워키 벅스를 차례로 물리치고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레이커스도 54승 28패로 서부지구 1위를 차지했고 플레이오프만 놓고 보면 보스턴보다 수월하게 NBA 파이널에 진출했다. 하지만 시리즈 도중 팀 내 득점 3위였던 저말 윌킨스가 부상을 당해 정상적인 컨디션이 아니었다. 물론 스타플레이어들로 이루어진 레이커스는 자신감이 넘쳤고, 전문가들도 대부분 레이커스의 공격력이 보스턴을 압도할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 1차전 결과는 레이커스의 115-109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2차전은 승리의 여신이 버드의 손을 들어준 것인지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만들었다. 경기 종료 18초를 남기고 레이커스가 113-111 2점 차 리드를 잡고 공격권까지 갖고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 공을 돌리거나 파울 작전으로 얻은 자유투로 점수를 적립하면서 경기가 마무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 경기는 제임스 워디의 어이없는 패스 미스와 제럴드 핸더슨의 가로채기로 동점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아직 시간은 13초나 남아있었고 레이커스에게 마지막 공격 기회가 주어진 상황. 공은 매직 존슨에게 주어졌고 팬들은 존슨이 마법 같은 결과를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13초 동안 어이없는 드리블로 시간을 날리며 경기를 연장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존슨도 이 날 자신의 플레이를 '무엇에 홀린 듯 이해할 수 없었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어이없는 플레이였다. 

 

  1시간 45분부터 해당 장면이 시작됩니다

경기는 연장전에 접어들었지만 이미 분위기는 보스턴의 것이었다. 보스턴은 2차전을 124-121로 가져가며 원정에서 1승 1패를 기록하는 성과를 거뒀다. 홈에서 열린 3차전을 104-137로 대패하며 분위기가 넘어갈 수 있었지만, 버드는 이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팀 동료들을 "계집애 같은 플레이를 했다"라고 질책하며 분위기를 다잡고 투지를 불태웠다. 지금 같은 사회 분위기라면 논쟁의 여지가 있는 발언이지만, 당시엔 리더에게 이런 마초 같은 리더십을 요구하는 시대였다. 

 

4차전부턴 보스턴의 투지와 강력한 육탄방어가 레이커스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연장 접전 끝에 129-125로 승리를 거둔 보스턴은 홈에서 열린 5차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LA로 옮겨 열린 6차전을 패했지만 다시 홈으로 돌아온 7차전 보스턴은 제공권 장악과 체력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며 111-102, 최후의 승리를 거뒀다. 당시 보스턴 홈구장이 보스턴 가든의 냉방 시설이 고장 나 30도가 넘는 기온 속에 5차전-7차전 경기가 펼쳐진 것이 '런앤건' 농구를 하는 레이커스에게 불리한 작용을 했지만, 매직 존슨이 중요한 순간 범한 실수가 패인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래리 버드는 파이널 MVP를 수상하며 5년 전 존슨에게 당한 아픔을 설욕할 수 있었다. 

 

라이벌을 통해 성장한 매직 존슨 '진정한 에이스로 거듭나다'

평범한 선수라면 자신의 결정적인 실수가 패인이 됐다면 좌절에 빠져 멘털 관리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자칫 경기력에까지 영향을 미쳐 낙오하는 경우도 있지만 매직 존슨은 전혀 다른 유형의 스타였다. 

 

압둘자바와 놈 닉슨, 마이클 쿠퍼 등 쟁쟁한 스타 덕에 데뷔 초반부터 우승을 맛 본 존슨은 이런 성공에 취해 있었다. 자신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해결사 역할을 해주는 선수들이 많다 보니 개인 역량보다는 팀 승리에 포커스를 맞추는 경우가 많았다. 예외적인 경우로 루키 시즌이었던 79-80 시즌 결승전, 압둘자바가 발목 부상 때문에 6차전 출전이 어렵게 되자 존슨이 센터로 뛸 것을 자원하며 팀을 승리로 이끈 경우가 있었다. 이 경기에서 존슨은 42 득점-15 리바운드-7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파이널 MVP까지 가져갔다. 

 

하지만 이 단 1경기를 제외하면 84년 이전까지 존슨의 '독한 경기력'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84-85 시즌부터 존슨의 플레이는 '각성'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62승 20패로 서부지구 1위를 차지한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 1~3라운드를 11승 3패로 무난하게 돌파하며 4년 연속 NBA 파이널 진출에 성공한다. 보스턴 역시 63승 19패를 기록하며 동부지구 1위를 올랐고 역시 무난하게 파이널에 진출해 2년 연속 레이커스 vs 보스턴의 파이널 맞대결이 성사된다. 

 

1차전은 지난해와 반대로 보스턴이 148-114 대승을 거뒀다. 레이커스 팬들은 이 경기를 '대학살의 날'로 평가할 정도로 형편없는 경기력이었다. 하지만 1차전 대패가 레이커스 선수들의 집중력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1차전과 완전히 달라진 수비력과 박스아웃을 통해 보스턴의 페인트존 장악력을 떨어트렸고, 이렇게 얻은 기회를 매직 존슨의 빠른 공격 전개로 점수를 만들어냈다. 결과는 83-84 시즌과 정반대로 레이커스의 4승 2패 우승으로 끝났다. 파이널 MVP는 카림 압둘자바에게 돌아갔지만 공수를 오가며 레이커스를 이끈 매직 존슨도 평균 18.3 득점-14 어시스트-6.8 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두 선수의 파이널 맞대결은 84-85 시즌이 마지막이다

라이벌이 친구가 되기에 필요한 '사소한 무엇'

'보스턴 왕조'를 만든 래리 버드와 '쇼 타임'을 이끈 매직 존슨은 각각 3번(1981, 1984, 1986)과 5번(1980, 1982, 1985, 1987, 1988)의 우승을 나눠가졌다. 

 

존슨과 버드가 단순히 불꽃 튀는 경쟁심을 선보이며 서로를 깎아내리고, 승리에 목매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NBA의 인기는 1980년대 후반 마무리됐을 수 있었다. 하지만 두 선수는 서로를 존중했고, 누구 못지않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우정을 이어나갔다. 

 

물론 두 선수가 처음부터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던 1984년 파이널, 피 튀기는 혈전 끝에 보스턴이 우승을 차지한 그 해. 그전까지 버드와 존슨은 서로를 '반드시 꺾어야 하는 숙적'이란 단계를 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치열한 경쟁을 펼친 뒤 두 사람은 친해질 수 있었고 그 계기는 CF 촬영 중 생긴 사소한 에피소드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버드의 고향에서 컨버스 운동화 CF를 함께 찍게 됐다. 콘티도 두 사람이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1on1을 펼친다는 라이벌 구도 그대로였다. 처음엔 서로를 의식해 촬영이 아니면 서로 대기하는 곳에서 대면대면 시간을 보내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1on1을 해줄 것을 감독이 부탁하자 매직은 "진짜 경기처럼 할까요?"라고 진지하게 물었다가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촬영이 계속되던 어느 날, 강한 바람 때문에 야외 촬영을 중단하고 창고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매직의 눈에 트랙터가 들어왔다. 호기심 많던 매직은 트랙터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버드가 "난 어렸을 때부터 일하기 위해 몰아봤다"라며 존슨에게 트랙터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다음 날 매직이 조그만 트레일러를 몰기 시작했는데 버드의 자상한 가르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버드는 존슨을 집으로 초대해 저녁을 대접했고 버드 가족의 따뜻한 대접에 감동받은 매직은 이후 버드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됐다. 

 

 

 

치열한 경쟁을 펼쳤지만 승부가 끝난 뒤엔 깨끗이 승복하고 서로의 업적을 존중했다. 백인과 흑인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두 선수에게 인입하며 불타는 라이벌 대결을 조성했지만, 서로를 존중하며 화려한 명승부와 스토리를 만들어낸 NBA의 스토리텔링은 미디어를 통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나갔다. 아이들은 아직 거칠고 불공평한 세상에서 농구만큼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농구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이런 스토리 속에 농구를 시작한 선수들이 90년대 NBA 도약기를 만들었고 이중 마이클 조던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두 선수의 강력한 라이벌 맞대결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농구팬들에게도 큰 귀감이 됐다. 이때부터 한국에도 AFKN을 통해 농구가 중계되기 시작했고 농구 마니아 1세대들이 나타났다. TV 보급과 세계화의 흐름 속에 NBA는 경쟁력 있는 라이벌 스토리를 만들어 강력한 브랜드로 성장했다. 

 

"버드와 나는 서로 거울을 보는 것처럼 닮았다" - 매직 존슨

NBA 역사의 동반자가 되다

매직 존슨은 에이즈 때문에 32살이 되던 1991년 다소 이른 은퇴를 선언한다. 1995-96 시즌 깜짝 복귀를 선언하고  32경기에 출전했지만 기대만큼 큰 임팩트를 남기지 못하고 바로 다음 시즌 선수 생활을 정리한다. 버드도  88년대부터 고질적인 부상에 시달리다 92년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 시즌에도 평균 20.2 득점-9.6 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만신창이가 된 신체를 극복하기엔 이미 많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농구팬들은 자신들과 10년간 함께한 스타의 이른 은퇴를 안타까워했지만, 농구코트가 아닐 뿐 두 사람의 존재감은 여러 분야에서 빛났다. 

1992년 올림픽 드림팀 1의 멤버로 압도적인 경기력과 함께 역사적인 금메달을 수상하며 잠시 선수 경력을 이어갔다.

드림팀 1의 멤버로 올림픽을 마친 이후 존슨은 임시 감독직을 거친 이후 사업가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야구팬이라면 LA 다저스의 공동 구단주로 미디어에 언급되는 것에 익숙할 것이다. 버드는 인디애나 감독으로 부임해 마이클 조던을 가장 끈질기게 괴롭혔던 끈적한 팀을 만들어냈다.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엔 인디애나 사장으로 활동하며 '올해의 경영인상'을 수상하며 선수와 경영자,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NBA는 평생 리그 발전에 기여한 두 사람을 잊지 않고 걸맞은 예우를 이어갔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버드가 1998년-존슨은 2002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됐다. 1996년 NBA 역사상 위대한 50인 'The 50 Greatest Players in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History'에 선정했고 2019년 8월엔 NBA '평생 공로상'을 수여했다. NBA에 많은 레전드 스타들이 있었지만 빌 러셀-오스카 로버트슨 다음으로 버드와 존슨이 선정됐다. 

 

NBA Lifetime Achievement Award

 

두 사람의 뛰어난 실력과 인성, 그리고 약간의 운이 결합되어 NBA라는 브랜드를 30년 넘게 지탱하는 기반을 만들었다. 수많은 스포츠 종목에 라이벌 대결 구도는 수없이 많이 펼쳐지지만 단순히 승패를 넘어선 의미를 만들어내고, 감동을 만들 때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 제대로 보여준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라이벌 구도는 단순히 스포츠에서만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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