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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다 보면 다양한 성격의 인간 군락을 경험하게 된다. 침착한, 열정적인, 냉소적인, 비열한 등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우리는 이런 성향을 단어 하나로 정리해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마이클 조던은 '열정적인 리더', 스카티 피펜은 '침착한 조력자', 스테픈 커리는 '침착한 승부사' 등등으로 대략적인 성격을 정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언급할 선수는 단순히 '괴팍하다'란 단어만으로 정리하기엔 복잡하고 다각적인 면을 갖고 있다. 선수 시절과 은퇴 후, 심지어 프로 데뷔전의 모습이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평가나 호감도 역시 코로나19 시국의 주식시장 그래프처럼 종잡을 수 없다. 하지만 한 번쯤 이 선수를 언급하고 연구해볼 가치는 분명하다. 이 글을 읽은 후 이 선수에 대한 느낌은 각기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바로 '리바운드 머신' 데니스 로드맨이다. 

 

 

JW: 내레 소싯적 농구 좀 좋아했지

 

 

'종북' 로드맨? 김정은의 절친이 되다

2000년 댈러스 매버릭스를 마지막으로 NBA 경력을 마무리한 이후, 로드맨은 종종 가십 뉴스로 존재를 알렸다. 큰 비중이 있는 그런 부류의 뉴스는 아니었고 '시끄러운 홈 파티를 벌이다 이웃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다' 라던가 '프로레슬링 대회 특별 선수로 출전했다' 와 같은 '해외 이모저모'에나 오를 것 같은 뉴스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로드맨이 2013년 전 미국인을 물론이고 대한민국 사람들까지 깜짝 놀라게 할 이슈를 만들어낸다. 

 

2013년 당시 북한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른 김정은의 초대로 북한을 방문한 것이다. 이미 선친 때부터 미국에 대한 적대 정책이 이어져오던 북한의 새지도자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지도자의 정체가 알려진 이후 스위스에서 유학한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고, 농구 특히 NBA 팬이란 사실 역시 사람들은 흥미로워했다. 자신은 김정일보다 개방적이고 대화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여지를 보여주고 싶은 것인지, 김정은은 로드맨을 초대했고 로드맨은 흔쾌히 북한행 비행기에 오른다. 당시 미국 선교사인 케네스 배가 북한에 2년 가까이 억류되면서 북-미간 냉기류가 흐르던 상황에 해외여행 가듯이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2013년 이후 다섯 차례나 북한에 방문한 로드맨은 김정은의 절친으로 자리매김한다. 어찌나 친해졌는지 2014년 1월 북한 현지에서 이루어진 CNN과의 생방송 인터뷰에서 케네스 배의 석방 여부에 대해 질문이 들어오자 "케네스 배가 그곳에서 어떤 짓을 했는지 아느냐? 그가 북한에 왜 억류됐느지 정확히 알고 있냐?" 면서 열폭하며 북한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인터뷰엔 로드맨과 함께 농구 행사를 하기 위해 방북한 동료 선수들이 함께했는데 난데없는 로드맨의 열폭에 동공 지진과 안절부절못하던 선수들의 모습은 신스틸러다. 

 

 

행사를 마치고 미국에 돌아온 로드맨은 당시 술에 취해있었고 압박감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며 사과했고, 이후 케네스 배의 석방을 위해 김정은에게 편지를 쓰는 등 나름 참회의 모습을 보여줬다. 당시 사람들은 편지를 썼다는 로드맨의 발언을 '허풍'으로 여겼지만, 2014년 11월 석방된 케네스 배는 이후 인터뷰에서 "로드맨도 큰 역할을 했다"며 거짓은 아님을 증명해줬다. 

 

그렇게 큰 사고를 치고도 로드맨의 북한 방문은 꾸준히 이어졌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후엔 김정은과 트럼프는 서로 통하는 부분이 많은 지도자라며 만남을 주선하려 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 이전 평화의 메신저는 어쩌면 로드맨이었을지도 모른다. (농담인 거 다 아시죠?) 2018년 싱가포르에서 트럼프와 김정은이 역사적인 첫 지도자 만남을 갖게 되자 CNN 인터뷰 도중 눈물을 흘리며 마치 친한 친구가 결혼식장에 오를 때나 볼법한 모습으로 기뻐했다. 

 

만약 로드맨이 북한을 발판으로 정치적인 입지를 굳히려 했다면, 혹은 정반대로 친선 대사로 활약하며 자기 이미지를 바꾸는데만 중점을 뒀다면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 어쩌면 로드맨은 김정은과 정말 절친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김정은도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농구를 보고 싶어 하고 여행을 하고 싶어 하지만 할 수 없어 슬퍼한다." 라며 김정은을 옹호하기도 했다. 오해해 둘러싸여 있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의 김정은에게 더 쉽게 동조한 것으로 보인다. 

 

로드맨의 유년 시절과 선수 시절의 행보를 본다면 그런 심증은 더 강해진다. 

 

 

 

 

불우한 어린 시절, 강해지고 싶었던 문제아

미국에 사는 저소득층 흑인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로드맨도 어린 시절을 매우 힘들게 보냈다. 1961년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던 필란더 로드맨 주니어와 엄마 쉘리 로드맨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는 로드맨이 태어난 지 얼마 안돼서 필리핀으로 떠나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필리핀에만 무려 4명의 아내와 27명의 자식이 있었다고 하니 정상적인 가족을 이루진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댈러스에 남겨진 로드맨의 가족도 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엄마 쉘리는 4가지 일을 해야 할 정도로 돈에 쪼들렸고, 농구에 소질을 보였던 두 여동생의 뒷바라지에 로드맨은 늘 뒷전으로 밀렸다. 여동생들의 덕을 본건 동생의 고등학교 소속팀에서 받아줬다는 정도지만, 168cm의 키에 운동 신경이 떨어지는 로드맨이 삶에서 느낄 수 었는 행복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많다. 로드맨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때의 상황을 매우 암울하게 회상하곤 한다. 

 

로드맨은 먹고살기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항 청소원으로 취직한다.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걸레질-빗자루질-걸레질'이 반복되는 일상에 지루해 할 때쯤 공항 상점 문이 긴 빗자루로 열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단순히 생각해도 도둑질=감옥행이란 것을 알 수 있지만 로드맨은 바로 행동으로 옮겨 공항 상점에서 시계 50개를 훔치는 데 성공한다. 우습게도 로드맨은 이렇게 얻은 시계를 주위 친구나 친척들에게 나눠줬고 별로 큰돈을 벌지 못했다. 게다가 바로 발각되어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주위 나눠준 시계들을 모두 수거해 다시 돌려주고서야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징역살이는 하지 않았지만 직장에서 쫓겨났고 로드맨은 집에서 할 일 없는 한량이나 다름없게 됐다. 

 

하지만 농구의 신이 로드맨에게 강림한다. 168cm에 불과했던 로드맨은 이 시기 1년 여만에 205cm까지 급격하게 성장했고 신체 능력만큼이나 농구 실력도 많이 나아졌다. 물론 축복 같은 성장 후 농구 영재가 됐다는 꿈같은 스토리가 바로 연결되진 않았다. 로드맨에게 장학금을 주고 처음 영입했던 게인스빌 대학에서 단 14 경기만 출전하고 학업을 따라가지 못해 1학기 만에 학교를 그만둔 것이다. 고등학교까지 공부하곤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문제아에게 대학은 적응하기 힘든 곳이었다. 로드맨은 댈러스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이후 "다신 대학에 가지 않으리라 결심했다"라며 회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다고 딱히 꿈이 있거나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직업을 찾아보라며 어머니가 용돈을 주면 그 돈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며 유흥을 즐기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2개월의 시간을 허송세월 하자 로드맨의 마음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때 또 한 번 기적이 찾아왔다. 

 

로드맨은 게인스빌 대학에서 뛴 14경기에서 평균 17.3득점-13.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로드맨의 엄청난 리바운드 능력에 큰 인상을 받았던 사우스웨스턴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의 잭 헤든 코치의 눈에 띈 것. 헤든 코치는 로드맨에게 장학금과 식비, 기숙사비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입학을 제안했고 그의 어머니도 "직업을 구하던, 학교로 가지 않을 거면 집을 나가라"며 선택을 강요한다. 이에 로드맨은 "다시 도전해야 할 때가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라며 학교와 농구코트로 돌아간다. 

 

NCAA가 아닌 하부 대학리그인 NAIA리그에 속한 대학교지만 3시즌동안 평균 25.7득점-15.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리그를 씹어먹는다. 시즌 내내 NAIA 올-어메리칸 팀에 뽑혔고 2번의 NAIA 리바운드 1위, .637의 필드골 성공률을 기록했다. NCAA 소속 선수는 아니었지만 엄청난 리바운드 능력과 끈질긴 수비 능력, 투박하지만 투지 넘치는 로드맨의 능력을 눈여겨본 디트로이트에 의해 1986년 드래프트 2라운드 27순위로 지명된다. 거의 마지막에 지명되긴 했지만 NCAA 출신이 아닌 선수가 NBA 드래프트 벽을 뚫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결과였다. 

 

 

 

 

악동 로드맨? 그저 농구를 하고 싶었던 투사 

그 이후 로드맨의 NBA 스토리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디트로이트와 샌안토니오, 시카고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5번의 우승과 7번의 리바운드왕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올해의 수비수상을 2번 획득하고 7번이나 올해의 수비 퍼스트팀에 오를 정도로 리바운드와 수비에 특화된 선수였다. 

 

다만 로드맨의 성향에 대해 몇 가지 오해가 있다. 아버지 같은 척 데일리 감독 휘하에 있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의 '베드 보이스 시절'과 마이클 조던이라는 황제의 카리스마에 눌렸던 '시카고 불스 시절'엔 조용했고 그런 리더가 없었던 샌안토니오와 그 외의 시절엔 팀 케미를 깨는 악동이었다는 점. 

 

하지만 로드맨은 단순하게 힘과 카리스마로 눌러야 하는 악동이 아니었다.

 

디트로이트 시절 로드맨은 문신도 없었고 염색도 안 했지만, NBA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빌 레임비어와 아이제아 토마스, 릭 마혼 등 피지컬을 앞세워 거칠고 상대를 괴롭히는 농구를 하던 디트로이트의 팀 컬러에 녹아들며 수비와 리바운드에 모든 스킬을 스펀지가 물을 먹듯 쑥쑥 빨아들인다. 이때 당시 순수하게 농구에 빠져있는 로드맨에 대해 척 데일리 감독은 "농구를 열심히 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모른다"라며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데일리는 로드맨이 농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아버지처럼 모든 것을 돌봐줬고 로드맨은 데일리를 "신"이라 부르며 아버지 이상의 존재로 따랐다. 로드맨의 성장과 함께 디트로이트도 성장했고 2번의 우승을 함께했다. 

 

그러나 모든 팀의 전성기는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다. 데일리 감독이 91-92시즌을 끝으로 디트로이트 독을 사임하고 베드보이스의 주축 멤버들도 팀을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하자 로드맨은 공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끼고 존재를 인정받았던 곳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여기에 애니 베이크스와의 첫 결혼도 실패로 끝나며 이혼까지 겹치자 정신적으로 나약했던 로드맨은 '자살'을 결심한다. 

 

1993년 2월 어느 날 밤 로드맨은 자살의 실행하기 위해 자신의 총을 들고 차에 탔다. 많은 고뇌를 거듭했지만 로드맨은 자살을 실행할 수 없었고 대신 어린 시절부터 정신적으로 나약하고 남을 위해 살아왔던 자신을 죽이고,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문제아' 로드맨으로 다시 태어났다. 오로지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되길 결심한 것이다. 이후 로드맨은 피어싱과 문신, 매주 염색으로 머리색을 바꾸며 우리가 현재 기억하고 있는 로드맨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리라 결심한 로드맨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디트로이트와 결별을 선언하고 트레이드를 요청한다. 디트로이트는 로드맨을 샌안토니오로 트레이드한다. 

 

샌안토니오에서 로드맨은 데이빗 로빈스과 팀 코칭스탭과의 불화로 문제를 겪었다. 그러나 이는 로드맨의 기행이 문제는 아니었다. 로드맨은 자신의 행복을 위한 삶, 개인 사생활에 간섭하는 것을 못 견뎠다. 그런 로드맨을 이해하지 못하고 데이빗 로빈슨은 "이곳 (샌안토니오) 사람들은 교회에 가길 원한다" 라던가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변했으면 한다"라는 식으로 로드맨을 갱생시키려 했다. 누구 개인 잘못이라기보다는 전혀 타협할 수 없는 신념의 충돌이었다. 

 

게다가 개인 자유 시간에 바이크를 탄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연예를 하는 등의 사생활에 팀 코칭스탭이 간섭하기 시작하자 로드맨의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경기장에선 여전히 강력한 리바운드 머신이었고 연습도 빠지지 않고 나왔지만, 팀은 그 이상의 억압을 통해 로드맨을 제어하려 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승부처만 되면 이타적으로 변하는 리더 데이빗 로빈슨에게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로드맨은 샌안토니오 내부에서 공공의 적이 됐다.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샌안토니오의 선택은 당연히 로빈슨이었다. 

 

시카고로 이적한 로드맨은 시카고에서 마이클 조던-스타티 피펜-필 잭슨 감독과 큰 문제없이 융화하며 3번의 우승을 이끈다. (물론 정말 가끔 초대형 사고를 치기도 했지만 샌안토니오 시절과는 차원이 달랐다)

 

 

 

 

조던의 카리스마 이야기를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의 이유로 로드맨은 시카고를 마음에 들어했다. 연습과 시합에선 동료를 무지막지하게 몰아붙이는 조던이지만, 그 외의 시간엔 동료들이 무엇을 하던 아무 상관도 하지 않았다. 이는 피펜을 비롯한 다른 동료들과 코칭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로드맨이 염색을 하건, 마돈나와 염문을 뿌리던, 여장을 하건 경기력에 문제가 없다면 모두 용납됐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주면 로드맨은 성실한 동료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우리 주위엔 로드맨이 없을까?

로드맨은 단순하게 몇 가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사례는 로드맨뿐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로드맨은 불우한 어린 시절과 우여곡절이 많은 어린 시절, 이혼 등에 의해 그런 선택을 했지만, 이런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그저 '또라이' 혹은 '악동'이라 불릴 뿐이다. 우리도 누군가를 우리 기준에서 선정하기 가장 쉬운 몇 가지 단어로 제단하고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닐지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물론 흉악한 범죄자나 사기꾼 같은 상종 못할 인간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지난 세월 우리 주변을 스쳐 지나간 많은 인연들 중 가벼운 오해나 성급한 결론으로 사라진 인연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로드맨도 김정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친구가 되려 다가서려는 노력을 할 정도라면, 우리도 그 정도의 노력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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